전력주제 [윤달]
윤달은 운이 좋은 달이라고 모두 말했다. 하늘의 신도, 땅의 신도 없는 달이라서 그 어떤 짓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며 기뻐했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오이카와는 길게 늘어진 축제 행진을 보며 투덜거렸다. 좋아할 거면 몰래 좋아하라고, 당사자 앞에서 말고. 오이카와는 거추장스러운 머리 장식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가마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축제는 벌써 7일째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풍습이 있었다. 윤달의 축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29일 윤일이 되기 여드렛날 전 21일부터 일주일간 축제가 이어졌다. 그리고 29일이 되는 자정에는 모든 축제가 끝나고, 하늘의 신인 오이카와는 자신의 거처로 들어갔다. 온종일 나오지 않은 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윤일은 신의 감시가 없는 날이니까.
올해도 윤달의 축제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곧 찾아올 윤일을 기다리며 축제를 즐겼다. 오이카와는 자신을 위한 축제임에도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럼, 편안한 윤일이 되시길. 명일에 뵙겠습니다, 오이카와 님.
오이카와의 처소 문이 닫히고, 하인들은 29일 정각이 되는 즉시 그곳을 떠났다. 혼자가 된 오이카와는 짙게 깔린 정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부러 발을 굴러서 소음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괴성을 질러 넓은 방 안이 자신의 목소리로 가득 차도록 하기도 했지만, 잠시뿐일 뿐, 금세 고요함이 방안을 메웠다.
늦은 새벽이 되어서 심심해진 오이카와는 하인들이 놓고 간 물병을 들어 대야에 물을 흘려보냈다. 달빛이 비친 물 안에서, 서서히 지상의 모습이 나타났다.
역시, 그럼 그렇지.
평소에는 꼬박꼬박 기도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던 사람들이 오늘은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방탕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성욕에 찬 이들은 사람들을 겁탈했고, 물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 오이카와는 잔뜩 실망하여 물을 외면하려 하다가, 문득 한 사람을 발견했다.
오이카와를 기리는 비석을 말끔하게 닦고, 그 앞에 절을 한 이 사람은 한 눈으로 보아도 소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챙겨온 것인지 손때가 뭍은 보자기를 풀어 소박한 공양을 바친 소년은 오랜 시간 동안 비석 앞을 서성였다. 귀여운 아이네. 오이카와는 기분이 좋아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빛날 정도로 반짝거렸다. 다른 이들은 사리 사족 채우기 바쁜데, 이 아이는 오늘 같은 날에도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일에는 항상 저기압이었던 오이카와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소년 덕분에 오이카와는 자신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거처의 정적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모두가 돌아간 늦은 밤중, 오이카와는 홀로 길어둔 물을 담아두고 그 소년을 찾아보았다. 아아. 오이카와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그는 소년티를 벗어 어엿한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키가 훌쩍 커 있었고, 어깨도 벌어져 남자다웠다. 보지 못한 4년이란 시간 동안, 소년은 어른이 된 것이다. 오이카와는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들어 아무도 없는 방을 두리번댔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늘도 그는 남들과는 달리, 홀로 산 중턱에 있는 오이카와의 비석까지 와서 기도를 드리는 중이었다. 귓가에 맴도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오이카와는 미소 지었다.
새벽이 지난 시간에서야 그는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그의 옷자락이 오이카와의 마음을 자꾸만 헤집어 놓았다. 혹여나 물결이 흔들려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까 오이카와는 숨을 참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되어 계속 지켜보던 와중, 어두운 숲 속 안에서 별안간에 두 명의 화적이 나타났다.
칼을 들고 청년의 돈주머니를 빼앗은 화적 단은 그대로 길을 가는 듯 보였다가, 금방 돌아와 그의 상·하체를 부여잡았다. 사지가 잡힌 그는 몸부림 쳤지만, 키와 몸이 두 배는 큰 성인 남자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오이카와는 뒤도 생각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지상의 세계였다. 풀 내음이 가득한 숲 한가운데 선 오이카와는 곧바로 그를 찾아 헤맸다.
스가와라!
스가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를 놀라서 쳐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을 입은 남자는 스가와라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잔뜩 화가 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스가와라의 팔다리를 잡은 화적을 노려보았다.
이런 불한당들을 보았나. 당장 그 손 놓지 못할까!
화적들은 고상하게 생긴 그를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면전 앞에서 그를 비웃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들의 명치에 손을 가져다 댔고, 그 순간 거구의 남자 둘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꿈쩍하지 않던 남자 둘이 단지 손을 댄 것만으로도 쓰러져버렸다. 스가와라는 믿을 수가 없어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씨익 웃는 그 얼굴이, 꼭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미안, 놀랐지?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데려다주마.
... 오이카와 님이시죠?
뭐, 뭐라고 했어, 지금?
스가와라의 말에 오이카와는 당황하고 말았다. 얼굴을 내보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담? 오이카와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자신을 알아보았지만, 결코 해칠 수도, 기억을 잊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이카와 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아, 뭐 이 정도야.
저, 신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에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나요? 꿈을 꾸는 건가요, 저?
스가와라는 투명하게 빛나는 두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오이카와는 웃어버렸다.
꿈 아니야.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골치 아프게 됐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그러면 괜찮겠죠?
일단 쟤네야 기억을 잃을 테니까, 상관없어. 스가와라 너만 조심하면.
오늘은 윤일이잖아요. 하늘의 신도, 땅의 신도 모두 쉰다는 그 날. 그러니까, 오늘 하루쯤은 규칙을 어겨도 괜찮지 않을까요?
스가와라는 자신이 말해놓고 아차, 싶었는지 입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해맑게 웃었다. 오이카와는 그 미소에 눈이 머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아버렸다. 스가와라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이상했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너무나 짧았다. 오이카와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함께 있는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기에 발을 재촉했다. 뒤따라오던 스가와라가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제 이름?
그 정도야, 뭐. 너야말로 어떻게 나를 알아본 거지?
그냥, 오이카와 님을 보자마자 알 것 같았어요.
잠시 발을 멈추고 뒤돌아 바라본 스가와라는 부끄러운 듯,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흐려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지만, 오이카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신의 신분인 오이카와와 인간인 스가와라는 만나서도, 이야기를 나눠서도 안 되는 관계였다.
스가와라의 집 앞에 다다른 둘은 갑자기 말수가 적어졌다.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스가와라의 모습에 오이카와는 입안이 씁쓸해졌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스가와라도 마찬가지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이카와 님...
조심하거라. 공양을 바치는 것도, 기도하러 오는 것도 좋지만, 밤에는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아. 특히 윤일에는.
오이카와의 말에 스가와라가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쓰라리게 아팠다. 우울해 보이는 저 얼굴의 표정을 바꿔주고 싶었다.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스가와라의 볼을 쓰다듬으려다가 멈칫, 손을 허공에 멈췄다. 만지면 위험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둘 사이의 격차가 더더욱 실감 나게 느껴졌다.
그럼, 들어가거라.
네... 감사했습니다.
스가와라가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본 오이카와는 하늘로 돌아왔다. 스가와라가 말했던 것처럼, 마치 꿈만 같았다. 텅 빈 방안에서 오이카와는 천장을 보고 누웠다. 막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보고 싶다. 햇빛이 만연한 오전에 스가와라는 어떤 모습일까. 윤일은 여전히 12시간 이상 남아있었다. 하릴없이 누워만 있던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켰다. 스가와라 말 대로, 윤일 하루쯤은 괜찮지 않을까. 오늘은, 감시가 없는 날이니까?
4년마다, 윤일이 돌아오는 그때마다, 오이카와는 지상으로 향했다. 스가와라가 죽고 난 후에는, 그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 스가와라를 만난 이후로, 더이상 윤일은 오이카와에게 외로운 날이 아니었다. 스가와라와 오이카와에게 윤일은, 둘만이 함께 나누는 기념일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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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달과 윤일의 차이를 찾아봤는데
29일 자체를 '윤일'이라고 부른다기에.. 전력주제랑은 사실 조금 다른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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