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주제 [고양이]
밤늦게나 온다던 비가 퇴근길부터 시작되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그다지 짜증 나지 않았다. 지하철에 탄 짧은 시간 만에 폭우가 쏟아져 내렸는지 역 앞에서 우산을 펼 때는 이미 깊은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몸을 다 가릴듯한 큰 우산을 쓰고 터벅터벅 큰 보폭으로 걸었다. 검은 구두 끝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리고, 긴 트렌치코트의 밑자락은 물에 젖어 짙은 갈색이 되어 있었다. 어서 빨리 집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게 몸을 점점 더 젖게 하는 것도 모르고.
맨션 바로 앞에서 남색 고양이를 발견했다.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리에프가 주변 고양이들에게 밥을 줘서 이따금 집 앞에 고양이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어라. 얜 못 보던 앤데.
겨우 손바닥 크기만 한 고양이는 몸을 핥짝거리며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찾은 쿠키를 부숴서 손바닥에 담아 내밀었다. 한참 경계하던 고양이는 쿠키를 물어 쏜살같이 맨션 뒤편으로 사라졌다. 여기서 먹어도 안 뺏어 먹어. 먹을 거 준 사람은 난데 왜 도망가는 거야? 은혜 모르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허탈해져서 중얼거렸다. 손바닥을 탈탈 털고 집에 들어가려 한 발짝 움직였을 때,
뭐야...? 나 주는 거? 아니, 괜찮아. 너 먹어. 괜찮다니까.
건조하고 바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 순전한 호기심에 고양이가 갔던 길로 걸어가 보니까 담벼락 옆에 웬 검은 형체가 앉아있었다. 이미 쫄딱 젖은 채로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바람 때문에 비가 다 튀는 바람에 그닥 효과는 없어 보였다. 새카만 검은 머리에서 금방이라도 회색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여기서 뭐 해?
고양이와 그의 친구 모두 화들짝 놀라 굳은 채로 고개만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가까이 다가가 둘의 몸이 가려지게 우산을 숙여주었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노란빛이 가득한 눈에 경계심이 가득해서 머쓱해졌다. 글쎄, 나 나쁜 사람 아니래도.
가출?
... 네, 뭐.
가출하기엔 영 나쁜 날씨네. 날을 잘못 골랐어.
시선을 피하는 눈에서 당황스러움, 두려움, 뭐 그런 게 보였다. 숨기려 얼른 고개를 떨궜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뇌리에 박혔다. 사람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눈을 또르르 굴려가며 한껏 어색해 하는 그 모습이 마치 낯을 많이 가리는 고양이 같았다.
집에 돌아가기는 싫을 테고. 우리 집에 올래?
뭐 때문에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비는 내렸고, 날씨는 점점 추워져서 입김이 나올 정도로 쌀쌀한데 얇은 자켓만 입고 있는 (그마저도 젖은) 이 소년이 불쌍하기도 했고. 가출이라는 그다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뿌듯해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이질감을 느낀 것도 있다. 무엇보다 그 부서질 정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서 맴돌아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길래 난 들고 있던 우산을 손에 쥐여주고 몸을 일으켰다.
이 빌딩 203호. 생각해보고 결정해. 문 열어놓을 테니까.
저기.
손등에 닿는 손가락이 얼음장 같았다.
고양이 데려가도 돼요?
좋을 대로.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 감추려 노력조차 하지 않은 흥미가 뚝뚝 흘러내렸다. 친절하게 웃어주려고 했는데, 그랬다간 겁을 먹고 도망가버릴 것 같아서 관뒀다. 조용히 뒤를 따르는 둘 중에서 누군가가 기분 좋은 듯 그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일단 둘을 욕실에 밀어 넣고 타올과 여분 옷을 꺼내 문 앞에 두었다. 먹을 게 있었나?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한 달 정도 유통기한이 지난 계란과 곰팡이 슨 치즈, 뭐 이런 먹었다간 탈 날 수밖에 없는 그런 것만 들어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 맥주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고 곧장 리에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마트는 저녁 시간을 맞아 붐볐고, 정신이 없어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카트에 담는데 야쿠에게서 전화가 왔다.
쿠로오, 리에프가 방금 이상한 소리를 해서 말인데.
어, 어.
고양이 간식 종류를 하나씩 비교하다가 이내 뭐가 뭔지 몰라서 그냥 다 카트에 담으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한숨 쉬는 야쿠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가출한 고양이를 집에 들였다는 게 무슨 말이야? 밥하는 거 도와달라는 말은 또 뭐고?
리에프가 또 앞뒤 다 자르고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했나 보다. 제법 무거워진 카트를 카운터로 끌면서 어떻게 설명해야 가장 간편할까를 고민했다.
길에 가출한 소년이 있어서 구원의 손을 내밀어 줬어. 지금 집에 있는데 먹을 게 없어서 야쿠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야 쿠로오, 미쳤어? 나쁜 의도로 접근한 애면 어쩌려고 집에 혼자 놔둬?
아차. 그 말을 들으니 집에 귀중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딱히 없었던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니 야쿠가 등신아, 멍청아 하며 리에프에게나 하던 비난을 해댔다. 양손 가득 무거워진 비닐봉지를 들고 빗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 아이를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모처럼 베푼 호의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나 자신을 찌르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결과적으로 멍청한 등신은 내가 아니라 야쿠였다.
꼬맹이는 어느새 바싹 마른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거실 카페트 위에 잠들어있었고, 옆에는 말끔해진 고양이가 뒹굴댔다. 소리가 나지 않게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가빠진 숨을 쉬며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해했다. 애초에 집에 데려온 건 나인데, 그래놓고 엄한 사람을 오해하고 말았다. 고개를 드는 죄책감을 눌러버리고 싶은 마음에 애꿎은 봉투만 쥐락펴락했다.
그 죄책감을 모조리 야쿠에게 전가하고 싶어서 막 도착해서 자켓도 벗지 않은 야쿠를 열심히 째려보았다. 잠든 아이를 곁눈짓으로 가리키자 야쿠는 붉어진 얼굴을 휙 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리에프는 긴 팔다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당탕 큰 소리를 내며 들어와서는 말도 없이 봉투에서 고양이 통조림을 꺼내 열었다. 야쿠와 나를 경계하던 고양이가 리에프에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와 몸을 비비적댔다. 배신이야, 진짜. 싱크대에서 손을 씻는 야쿠 옆에서 중얼대자 야쿠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댔다. 리에프는 동물이잖아.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게 당연한 거야.
뭐라도 만들어봐. 엄한 사람 오해한 죄는 갚아야지.
니가 너무 무른 거야. 애초에 길거리에 있는 사람을 서슴지 않게 집에 들이는 사람이 어딨어?
투덜 대면서도 야쿠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쌀을 씻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한 와중에도 미동조차 않고 잠든 꼬맹이를 한 번 보고, 욕실로 들어가 긴 샤워를 마쳤다. 보송보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야쿠가 난처한 얼굴이었다. 왜? 말없이 입 모양으로만 묻자 야쿠가 턱 끝으로 꼬맹이를 가리켰다. 너무 곤히 자서 못 깨우겠어. 네가 깨워.
거실 가운데 잠든 꼬맹이 앞으로 다가간 순간, 리에프와 잘 놀고 있던 고양이가 그르렁대며 다가왔다. 어깨를 흔들어 깨우려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이를 드러내며 손을 노려봤다. 철저하게 미움받고 있었다. 웃음을 터뜨린 리에프 때문에 시끄러웠는지, 아이가 눈을 비비적대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는 여전히 그릉대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좋은 사람이야, 봐봐.
부스스한 검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귀 뒤에 꽂은 그가 덜컥 내 손을 잡았다. 뭐, 뭐지? 영문을 몰라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꼬맹이는 내 손을 자신의 머리 위로 올리더니, 시선을 위로 향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쓰다듬어주세요.
얼떨결이었다. 꼬맹이의 말을 곱씹고 또 생각하다가 그가 또다시 '빨리요' 라고 말하는 턱에 생각이고 뭐고 저 멀리 치워두고 얼떨결에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에서 내가 쓰던 샴푸 향기가 풍겼다. 한참을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는 데 열중했다. 꼬맹이는 고양이의 턱을 간질이더니, 그렇지? 라고 말했다. 마치 고양이는 꼬맹이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그 순간 경계를 풀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비비적대며 허벅지에 몸을 비비는 걸 보니 기가 다 찼다. 저기, 너 말이야. 혹시 동물이랑 얘기할 수 있다거나 뭐 그런 거 아니야?
내 반쯤 농담 같은 질문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하는데, 입가에 작은 미소가 보였다. 어! 너 방금 비웃었지? 필사적으로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야쿠가 그 정도만 하고 와서 밥 먹으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식탁 위에 놓인 네 개의 접시에는 케첩으로 스마일을 그린 오므라이스가 담겨 있었다.
역시 야쿠상 요리가 제일 맛있어여.
입 닫고 먹어, 리에프.
그래서, 너는 이름이 뭐야?
내가 꼬맹이에게 질문하자 그는 집중되는 시선이 불편한지 서둘러 눈을 아래로 피했다. 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코즈메...
코즈메?
켄마.
켄마구나. 그럼 켄마라고 부를게.
아니요. 코즈메라고 불러주세요.
켄마 쪽이 부르기 편한데? 나는 쿠로오 테츠로.
쿠로상.
아니, 쿠로오.
쿠로.
쿠로오.
쿠로상이 켄마라고 부르니까 저도 쿠로상.
얘 보통이 아니구나... 아무렇지 않게 다시 밥을 먹는 켄마를 보던 야쿠가 풋,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리에프는 '저도 쿠로상이라고 불러도 돼요?'라며 눈을 반짝거렸다. 시끄러워- 리에프를 한 대 쥐어박고 오물대며 밥을 씹는 켄마를 흘끗 댔다. 조그만게 보통내기가 아니야, 진짜.
야쿠와 리에프가 가고, 시끄러웠던 집이 가라앉은 듯 조용해졌다. 켄마는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잠든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불과 베개를 가져와 소파에 내려놓고, 스탠드를 불을 제외한 모든 불을 껐다. 따뜻한 노란 빛이 거실을 메웠다.
소파 불편하면 에어 매트리스 펴줄게.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 그럼. 자라.
저, 쿠로상.
뒤를 돌아 여전히 카펫 위에 앉은 켄마를 내려다 보았다. 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켄마의 한 쪽 얼굴이 빛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는 켄마는, 아주 잠시지만 기뻐 보였다.
응?
고마워요.
켄마의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시 쳐다본 켄마는 이미 시선을 피해버린 뒤였고, 뭔가 쑥스럽기도 하고, 뻘줌해서 그냥 '잘자' 한마디만 간신히 하고는 방으로 향했다.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 누우면서, 활짝 열린 방문을 쳐다보았다. 항상 문을 닫고 잤는데. 왜지? 이불 안에 들어가면서 자신에게 물었다. 오늘은 왜 문을 열어뒀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안돼. 이불 더럽히면 혼나. 조용히 타이르는 켄마의 목소리. 신기하게도 고양이는 곧바로 조용해졌다. 쟤 진짜 동물 말 할 줄 아는 거 아니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스르륵 잠이 들면서, 문득 방문을 열어둔 이유를 깨달았다. 켄마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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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은 진짜 예전에 다 풀어놨는데
쿠로켄 전력주제가 고양이길래 발굴해내서 후다닥 씀
썰은 더 길게 풀었는데 분량만큼 다 쓰려면 전력 참가 못할 것 같아서 자름. 나머지는 언젠가 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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