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주제 [기억상실]
뭐지? 켄마는 눈을 뜨자마자 지잉- 울리는 머리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텅 빈 머릿속은 아무런 답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켄마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누워있던 침대는 푹신하다 못해 흐물흐물 거릴 정도여서 그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아, 춥다. 켄마는 물끄러미 옆을 쳐다보았다. 손바닥만한 속옷 한 장만 걸친 남자가 이불을 전부 다리 사이에 쑤셔 넣고 자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침은 왜 저리 많이 흘리는 걸까? 턱에 구멍 났나?
남자의 얼굴 아래에 생겨난 자그만 웅덩이를 유심히 살펴보던 켄마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테라스로 걸어갔다. 청소라는 건 모르고 지내온 사람의 방이었다. 지저분하다 못해 무질서 그 자체인 공간 안에 있었다. 켄마는 무심코 지나치려던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 같은 눈이 어색했다. 눈을 깜박거리며 손을 들어 두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움푹 패인 볼이 볼품없었고,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검은 머리는 지나치게 어두웠다.
일어났어?
뒤편에서 들려온 소리에 켄마의 어깨가 움찔했다. 거울로 바라본 남자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 눈을 비비적대고 있었다. 응. 켄마는 이질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미간을 끌어당겼다. 남자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쓱쓱 빗으며 거울 안의 켄마와 눈을 맞췄다.
나는 쿠로오 테츠로. 너는?
... 글쎄. 나 누구지?
그게 무슨 -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뭐, 네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다는 거야?
그런가 봐.
뭐?
기억상실증에 걸렸나 봐.
-
이제 이런 아날로그식 감성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는데 말이야.
늦은 밤이었다. 바지는 반쯤 내리고,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쿠로오는 그렇고 그런 잡지를 창 너머에서 비치는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구경하던 중이었다. 누나들의 대범한 포즈에 얼굴을 붉히던 와중에 갑자기 빛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방이 캄캄해졌다. 뭐지? 쿠로오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을 가린 형체 모를 무언가에 덜컥 놀란 쿠로오가 허겁지겁 일어나 창문을 벌컥 열었다. 설마. 유에프오인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틀에 정확하게 맞은 그 무언가가 나풀대며 쿠로오의 베란다 위로 떨어졌다.
사, 사람이다.
쿠로오는 기겁하며 정신을 잃은 사람을 흔들어 깨웠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입안이 바싹 말라오며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하던 중, 쿠로오는 쓰러진 사람을 받치고 있던 손안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사람을 살짝 들춰 올리자, 등 뒤로 돋아난 두 개의 흰 날개가 슬금슬금 손 아래로 빠져나왔다.
정신을 잃은 건 나였던가?
이거 사실은 몰래카메라인가. 이제 그만하고 나오시지? 하나도 안 웃기거든. 혼자 중얼대며 카메라를 찾아 헤맸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쿠로오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니라면 이것. 분명 심상치 않은 이 무엇을...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고.
쿠로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그를 안아 자신의 침대 위에 눕혔다. 일단 자자. 자고, 내일 일어나서 다시 생각하자. 그래, 누가 알아? 일어났을 땐 이 소년이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르고.
결과적으로 켄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쿠로오는 눈곱이 달라붙은 눈을 비비면서도 반들반들한 등을 여태껏 응시하고 있었다. 맨살에는 날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을뿐더러,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내가 꿈을 꾼 건가? 그러나 생생하게 만져지던 부드러운 날개의 감촉이 떠올라, 쿠로오는 결코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님을 알았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응.
그럼 어떡할래?
글쎄.
나랑 있을래? 기억 돌아올 때까지?
그러지 뭐.
둘의 동거는 즉흥적으로 시작되었다. 며칠 뒤에 켄마는 자신의 이름을 간신히 기억해냈고, 쿠로오는 그때부터 루틴을 따르는 것처럼 매일 아침 켄마에게 물어보았다. 오늘은 뭔가 기억나? 켄마의 대답은 항상 '아니' 로, 쿠로오는 켄마가 그 질문을 달갑지 않아 한다는 걸 느꼈다.
함께하는 날들이 계속될수록 쿠로오의 마음 한켠에는 자신이 본 날개가 사실은 환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생겨났다. 이렇게 보통 사람과 똑같은데. 말을 하는 것도, 숨을 쉬는 것과 심장이 뛰는 것, 눈을 깜빡이는 것과 같은 행동거지가 모두 사람 같은데 날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쿠로오는 단지 자신이 착각했을 거라 치부했다.
근데 말이야.
...
켄마, 자?
안 자.
쿠로오 혼자서 잘 때 늘 좁아서 불만이었던 침대가 이상하게도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쿠로오는 손목으로 두 눈을 덮었다. 순식간에 깊은 어둠이 들이닥쳤다. 쿠로오는 마치 켄마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서둘러 켄마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켄마의 어깨가 손에 닿았다. 아무 데도 안 갔구나. 쿠로오는 달아오른 심장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말을 이어갔다.
켄마. 기억이 안 돌아와도 괜찮아?
별로 상관없어.
가족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애인이나, 친구들이 찾고 있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쿠로가 있으니까.
마치 줄곧 생각해온 사람처럼 켄마의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
쿠로?
...
자?
...
잘 자.
뿅뿅 거리는 소음이 자그맣게 울리다가, 이내 음소거 버튼을 누른 켄마 덕에 정적이 찾아왔다. 쿠로오의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던 켄마가 몸을 틀어 벽을 바라봤다. 어깨에 놓인 쿠로오의 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
나 어제 꿈꿨어.
욕조에 물을 받아서 목욕을 하던 켄마가 별안간 그렇게 말했다. 쿠로오는 거울을 보고 면도를 하다말고 물었다.
무슨 꿈?
하늘을 날고 있었는데, 쿠로가 돌로 나를 맞춰서 추락했어.
...뭐?
한 손에는 거품이 묻은 면도기를 들고 쿠로오는 뒤로 돌아 욕조 안의 켄마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마주한 켄마의 눈이 무섭도록 차가웠다. 쿠로오는 덜컥 겁이 났다.
아팠어.
...
왜 그랬어?
케, 켄마. 그냥 꿈이잖아.
꿈 아니야. 쿠로가 그랬잖아. 날고 있던 나를 여기 가뒀잖아. 쿠로, 대답해봐. 왜 그랬어?
욕조에 담긴 물이 흘러넘치며 새빨갛게 변해갔다. 쿠로오의 발치에 닿은 물이 얼음같이 차가워 쿠로오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쉬며 뒷걸음쳤다. 순간, 온통 어둠이 내리 닥쳤다.
아, 꿈인가.
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쿠로오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으며 자연스레 옆자리를 보았지만, 켄마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속도를 천천히 늦춰가던 심장박동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좁은 방 안에 켄마는 없었다. 어딜 간거지? 방 안을 서성이던 쿠로오의 눈에 문틈 사이로 화장실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열린 틈 사이를 빼꼼 쳐다보던 쿠로오의 호흡이 갑작스레 멈췄다.
화장실의 노란 조명 빛 아래 서 있는 켄마는 이상하게도 하얗게 빛났다. 쿠로오에게 등을 지고 선 그의 등 뒤로 펼쳐진 두 날개가 투명하리만큼 하얬다. 쿠로오는 잠시 넋을 잃고 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거울을 마주하고 있던 켄마가 거울에 비친 쿠로오와 눈을 마주쳤다. 어, 어... 쿠로오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당황해서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쿠로. 나 다 기억났어.
켄마.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난 단지 뭔가가 있길래 확인하려고 창문을 열었던 건데-
괜찮아. 화 안 났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얘기해줬어야 했는데.
괜찮다니까.
꿈과는 다른 전개에 쿠로오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정적이 둘 사이를 오갔다. 쿠로오는 계속 신경 쓰이던 질문을 그제야 켄마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고 싶지만, 이미 늦었어. 오랫동안 하늘로 돌아가지 않아서 이제 곧 날개가 없어질 거야.
그렇게 대답하는 켄마의 목소리에는 격한 감정 따위는 깃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기력한 것 같은 담담한 느낌이었다. 쿠로오는 켄마 앞으로 다가가 그의 등에 솟아난 날개를 쓰다듬었다.
방법이 없어? 지금 날개가 있잖아. 지금 돌아가면-
쿠로는 내가 돌아갔으면 좋겠어?
훅, 하고 들어온 질문은 마치 명치에 꽂히는 펀치같이 쿠로오를 당황하게 하였다. 뭐? 당연히 아니지. 켄마의 날카로운 눈을 향해 쿠로오가 대답했다.
난 괜찮아. 여기 있는 게 더 좋아.
...
쿠로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야, 켄마. 나도 네가 아무 데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응.
그럼 날개 따윈 사라져도 좋아.
켄마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그의 날개가 스르륵 사라졌다. 쿠로오는 품에 안긴 켄마의 등을 토닥였다. 가지 마, 켄마. 나랑 있어.
그리고,
쿠로오의 품에 안긴 켄마는 모든 게 제 생각대로 됐다는 생각을 하며 몰래 미소 지었다.
-
천사 켄마...?
쿠로오를 갖고 싶어서 기억을 잃는 것조차 꾸며내는 켄마가 보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널 갖고 싶었어 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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