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머메이드

전력 2016. 3. 20. 23:22

전력주제 [동화]

 

 

눈을 뜨니 하얀 거품이 온몸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차갑다고 느낀 순간 벌떡 일어나 나체의 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 밖에서 숨을 쉬는게 얼마만이더라. 잘은 모르지만 시간이 꽤 흐른 것은 분명했다.


바닷물을 꿀꺽꿀꺽 삼킨 나는 바닷속 깊숙한 곳에 가라앉았다. 거품이 되었고, 그 거품 하나가 쪼개지고 쪼개질 때마다 고통에 울부짖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지면 위로 떠올랐지만 기쁘지 않았다. 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래야만 이 행복하지 못한 동화속의 이야기가 끝이 난다고 믿었다.

 

 

 

 

 

 

 


강의실 맨 뒤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관심없는 척, 무료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나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저절로 시선은 얼굴로 향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와이즈미를 못 알아볼리가 없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2시 정각에 강의실 문이 열리고 나이가 지긋한 교수가 구두소리를 내며 들어온 순간, 나는 조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이즈미와 마주칠 것은 뻔했다.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공간 안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던 그때, 문은 다시 열렸고, 이와이즈미는 지각을 했음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안으로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들어온 순간부터 딱딱하게 경직된 나는 억지로 얼굴을 고정시키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한대 칠 것 같았으니까.


어이, 미안한데. 혹시 출석 불렀어?
...아니.
너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너 때문이라고! 널 증오하고, 저주하고, 비틀어버리고 싶기 때문이란 건 모르겠지. 난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앞을 쳐다봤다.


몸 안 좋으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저리 꺼져.
뭐?


고개를 돌려 쳐다본 이와이즈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그 못생긴 얼굴을 보니 내가 왜 저런 새끼 때문에 이 생고생을 하고 있나, 싶어서 더 화가 났다.


꺼지라고. 내 말 못 알아들어?

 


순간 욱 한 이와이즈미가 주먹을 불끈 쥐는게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칠판을 향했다. 교수는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적었다. 한 획, 한 획을 눈으로 쫓으며 이를 악 물었다. 이와이즈미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서.

 

 

 

 

 

 

 


거의 모든 강의를 같이 듣는 턱에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별 도리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도 내가 미친놈이라고 여겼는지 옆자리에 앉는다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시선을 맞닥드릴때 그는 먼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맨 뒷자리에 앉아 삐죽삐죽 세운 그의 뒷머리를 보다 보면 웃음이 나왔다. 웃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른 입술을 꾹 물었지만 강의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입가가 아렸다. 펜을 쥐고 뭔가에 열중한 듯이 글을 적는 그 모습은 아주 조금 잘생겨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억지로 고개를 떨어트려 두 발을 내려다보았다. 내 목소리와 맞바꾼 다리. 그리고 나를 버린 너. 내게는 이 발이 이와이즈미에 대한 증오였다.

 


왜 하필 너야.
나도 너랑 하는게 마냥 편하지는 않거든?
조 바꿔달라고 해. 난 너랑 안 해.
그렇게 싫으면 네가 말해. 저 교수가 바꿔줄 거 같지는 않다만. 
... 그냥 내가 다 할테니까 너는 이름만 올려.

 


싸늘하게 얼어붙은 목소리로 내뱉듯 말하자 이와이즈미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얼른 자리를 피하려 움직이자 이와이즈미가 어깨를 부여잡았다.


오이카와. 너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냐? 내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어?
그래. 잘못했어. 잘못해놓고 너는 기억도 못하니까 내가 얼마나 열받는지 넌 알기나 해? 그러니까 앞으로 말도 걸지말고, 아는체도 하지 마.


이렇게 심하게 말했으면 포기하겠지. 어깨에 올린 손을 털어내고 한 발짝 뗀 순간 이와이즈미의 손이 다시금 어깨를 끌어당겼다.


뭘 잘못했는지나 좀 알자.
그럼 그때 이렇게 물어보지 그랬어. 그때 딱 한번만 물어보지 그랬냐고.

 


멍청아. 바보, 멍청이 이와이즈미.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와이즈미를 뒤로하고 나는 얼른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조별과제를 혼자 떠맡게 된 턱에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나오던 참이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건너편에 비틀비틀대며 멈춰선 사람은 멀리서 봐도 이와이즈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신호등 위의 파란불이 유난히 밝게 빛났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다시 건너편을 보았을 때 이와이즈미는 거기 없었다.


어라.


찰나의 순간에 예전의 기억이 재빠르게 머리속을 휘저어놓았다. 한 걸음 떼기도 힘들어보이던 이와이즈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길을 건너고 있었다. 두 번 생각할 새도 없이 그의 앞으로 뛰어가 이와이즈미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 어- 중심을 잃고 넘어진 이와이즈미 뒤로 오토바이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지나갔다.

 


너 미쳤어? 정신 똑바로 안 차리고 다녀? 그러다 죽으면 어쩌-


그러다 입을 턱 다물었다. 아. 또 이와이즈미의 목숨을 구하고 말았어.

 


여전히 상황파악이 덜 된 이와이즈미가 길바닥에 앉아있던, 그의 친구가 헐레벌떡 건너편에서 뛰어왔다. 야, 괜찮아? 이와이즈미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발을 재촉했다.


쟤 똑바로 챙겨.


그의 친구에게 충고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지. 큰일이야. 이러면 예전과 다를게 하나도 없는데. 결말은 또 똑같이 나의 죽음으로 끝날 게 뻔한데.


강의 시작 전 책상에 엎드려 끊이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를 떠올릴 수록 목이 죄어왔다. 그때 누군가 옆에 앉는 소리에 퍼뜩 얼굴을 들었다. 이와이즈미의 손에 들린 검은 봉지가 조금씩 흔들렸다.


이거 먹어.
책상에 힘없이 툭 떨군 봉지 안을 보자 내가 매일 점심으로 먹는  커피우유와 우유빵이 들어 있었다.
안 먹어. 너나 먹어.


다시 책상에 엎드리려는데 이와이즈미가 팔을 잡아서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스러움과 같은 감정이 서려있었다. 어딘가 조금 달아오른 얼굴을 그는 황급히 돌려 내 눈을 피했다.  


어젠 고마웠어.
뭐?
네 덕분에 살았어. 어제는 술 취해서 정신이 없어서 고맙단 말도 못했다. 미안.
...
너 매일 이거 먹는 거 봤어. 안 먹는단 말 하지말고, 먹어. 다음에 답례로 밥 살게.
...
오이카와.
어?
너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자리를 박차고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비좁은 화장실 칸 안에서 쿵쾅대며 뛰는 심장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눈물 때문에 문에 쓰여진 낙서가 보이지 않았다. 바짝 마른 목구멍에 애써 삼킨 침이 그새 사라졌다.

 


이와이즈미가 기억을 했다.
내가 구해준 걸 기억했어.
그렇다면, 이번에는 기회가 있는 건가. 내 죽음으로 끝이 났던 그 결말을 바꿀 수 있는 걸까?

 

 

 

 

오이카와. 아까는 왜 그러고 갔냐? 내가 또 뭐 실수했어?
그거 이리 줘.


이와이즈미의 손에 들린 봉지에서 빵을 꺼내 포장지를 뜯었다. 크게 한 입 베어물자 크림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와이즈미는 짐짓 놀란 눈으로 내 손에 들린 빵과 빵을 씹고있는 내 입을 번갈아 쳐다봤다.

 


안 먹을줄 알았더니.
먹어도 지랄이야.
지- ... 휴, 지랄이라니 무슨 말이 그러냐. 어쨌든, 너 내일 시간 돼?
어.
밥 먹자.
그러지 뭐.
...진짜?
너 나한테 시비거냐?
그게 아니라, 좀 놀라서. 너 나 싫어하잖아.
싫어하는 거 아니야.

 


단지 너랑 아주 닮은 오-래 전의 그 사람을 증오하는 거지.

 

 

 

 

 

 

 


포크로 접시 위에 담긴 하얀 살의 생선을 쿡 찌르자 부드러운 살이 으스러졌다. 두피 끝까지 소름이 돋아서 포크를 내려놓고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안 먹어?
나 해산물 안 먹어.
뭐?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다른데 갔을 거 아니야.
기억 못하는 네 잘못이지.


입맛이 떨어진 건지, 똑같이 포크를 내려놓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에 큰 물음표가 떠 있었다. 뭘 기억 못한다는 거야. 중얼대는 이와이즈미의 말을 모른척하고 사이드로 딸려온 샐러드를 입안에 넣었다.


다음에 네가 가고 싶은데 말해. 거기서 사줄게.
됐어, 이거면 돼.
오이카와, 그러지 말고.
이와이즈미.
어?
...아냐.


뭔데, 말해봐. 그렇게 말하는 이와이즈미를 무시하고 컵에 담긴 물을 전부 마시며 입가에 걸쳐진 말도 함께 삼켰다.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나지 않냐고.

 

 

 

날이 선 말이 오가지 않는 횟수가 늘고, 얼굴을 마주보고 웃어도 거부감이 들지 않게 되면서 일말의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결말이 바뀌는 건가 싶어서 행복하기 까지 했다. 이와이즈미의 다른 친구의 말을 듣기 전 까지는.


너 다음 달 여자친구랑 기념일 아니야? 너네 곧 결혼하겠다, 사귄지도 벌써 몇 년째인데.

 


그럼 그렇지.
내가 구해준 걸 기억하면 뭐하나.


산산조각 난 가슴이 피를 흘리며 발치에 툭, 떨어졌다. 이와이즈미와 그의 친구가 하는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잠시 전 까지만해도 멀쩡하던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은 것처럼 숨 쉴때마다 속이 아팠다.

 

 

 

흐린 날씨의 바닷물은 파랗지도, 맑지도 않았다. 흙탕물처럼 더러워진 물에 발을 담궜지만 차갑지 않았다. 이 물에 가라앉고 나면. 거품이 되고 나면 모두 잊히길. 그리고 이와이즈미와는 다시 마주치지 않길.


그런 기도를 하염없이 했던 기억이 난다.

 

 


...뭐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눈을 뜨고 깨어난 나를 본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떨궜다. 삑, 삑 거리는 병원 기계의 소음이 들리자 기분이 한없이 나빠졌다. 죽는데도 실패하다니. 내 간절한 기도가 이렇게 쉽사리-


이 멍청한 놈아.


얼굴을 확 구기며 그를 노려보자 이와이즈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 아래로 끝이 빨개진 코가 보였다. 당황스러워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이와이즈미가 갑자기 내 손을 움켜쥐었다.


멍청카와 이 자식아.
엉엉. 우렁찬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퍼졌다. 우는 거 정말 못생겼네, 이와쨩. 나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너 익사했어, 알아?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치는 이와이즈미의 손을 토닥였다. 손톱이 다 갈라지고, 손등이 상처 투성이었다. 이와쨩이 구해준 거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 목소리는 왜 안 나와?'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며 목을 가리키자 급속도로 이와이즈미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성증.
소리를 내는 신경에 문제가 생겨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의사가 설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문제의 원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녀. 내 목소리가 좋긴 하지만, 또 가져가다니. 정말 집요하게 구네.

 

너 죽었을까봐 미치는 줄 알았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가 왜 미쳐. 나랑 안지 얼마나 됐다고.

 

오이카와. 좋아해.
...
이 답답카와야, 너 좋아한다고.
...

여자친구는 어쩌고? 오래 사귄 여자친구 있다며. 그건 뭔데. 라고 말 하고 싶어서 펜을 찾아 두리번 대는데 이와이즈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자친구랑은 헤어진지 꽤 됐어. 너 좋아하는 거 자각한 이후로 내가 헤어지자고 했으니까.
...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강의도 안 나오고 전화도 안 받아서 무슨 일 생겼나 했지. 네가 어디에 있을까 싶어서 집에 갈지, 도서관에 먼저 갈지 고민하는데 갑자기 그 바닷가가 떠올랐어. 거기에 네가 있을 거 같았다고.
...
오이카와. 너랑 나, 이어져야 하는 운명 아닐까?

 


아아. 저주가 풀렸다.


좋아해. 오이카와.

 


이와이즈미의 핸드폰을 빼앗아 문자메시지 창에 입력했다.

'나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도?'
상관 없어.
'정말로?'
그렇다니까, 바보카와.
'아, 어떡하지.'
왜 그래. 어디 불편해? 간호사 불러줘?
'... 너무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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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ikyuu_re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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