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주제 [목소리]
처음에는 입학할 고등학교에 신설 체육관과 수영장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지만, 금세 수영 수업이 지겹고 귀찮아진 건 모든 것에 쉽게 실증을 느끼는 내겐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그 수업을 한 달에 한 번 있는 그 일을 빌미로 빠지는 여자애들이 부러워 죽을 것 같았다. 밖에는 아직 찬 바람이 불어 맨손이 금방 차게 식는데 우리는 계절감에 맞지 않는 손바닥만한 수영복을 입고 공기가 서늘한 실내 수영장으로 모였다. 코끝을 찌르는 락스냄새와 남실대는 파란 물이 지겨워 빨리 수업이 끝나버렸으면 했다. 결과적으로, 내 소망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스가와라는 수영을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너, 물에 뜨긴 하지? 수영 수업 첫날 체육 선생이 스가와라에게 반신반의하며 물었을 때 스가와라는 말없이 고갤 저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나머지가 자유형을 배우는 동안, 스가와라는 물에 뜨는 방법부터 배웠다.
체육 선생은 넘치는 의욕으로 유명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그게 그의 원칙이었다. '안 뜨면 뜨게하라' 라는 기세로 그는 스가와라에게 수영 특훈을 시켰다. 그래서 난 금세 선생이 자유형 하는 법을 가르쳐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킥판을 사용하는 스가와라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쟤 물에 뜨는 거 배웠는데 왜 킥판 써요? 내가 그렇게 묻자 체육 선생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긁적였다. '쟨 킥판 없이는 발차기가 안 되더라...' 망연자실한 체육 선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킥판을 움켜쥐고 고개를 물 안으로 박은 채 25미터 구간을 헤엄치는 스가와라에게로 다시 눈을 돌렸다. 반쯤 물에 잠긴 그의 몸이 창백한 백열등 아래서 하얗게 빛났다. 곧게 뻗은 다리를 움직이자 투명한 물보라가 발아래에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그의 의지이던 아니든 간에, 쿠로오 테츠로를 포기하게 할 정도라면 스가와라 코우시도 어지간히 수영에 일가견이 없는 애인 것 같았다.
쿠로오 테츠로가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튀어간 사이, 스가와라는 혼자 헤엄을 치고 있었다. 나는 풀장 밖에 앉아 한쪽 구석에 놓인 디지털 시계의 빨간 숫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계속해서 들려오던 소음이 사라졌단 걸 깨달았다. 풀장 한가운데에 스가와라가 쓰고 있던 노란 킥판이 둥둥 떠 있었다. 스가와라는 온데간데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바로 물 안으로 뛰어들자 건조했던 피부가 단숨에 젖어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발버둥 치는 스가와라가 보였다. 팔로 물살을 가르는 것이 힘겨울 정도로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물의 무게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주위는 애들이 지르는 소리로 시끄러웠고, 제대로 호흡도 못 하고 헤엄친 탓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도 나는 스가와라를 물 밖으로 꺼내자마자 배웠던 대로 그의 허여멀건 한 가슴팍을 깍지낀 손으로 여러 번 눌렀다. 손 아래 느껴지는 힘없는 몸과 축축한 피부에 덜컥 두려워졌다. 아무 힘도 못 써보고 허무하게 끝나는 건 아닐까? 눈을 꼭 감은 스가와라의 모습에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스가와라의 창백한 볼을 움켜쥐었다. 입술을 벌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채 보라색이 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후우- 남아있는 날숨이 하나도 없도록 스가와라의 폐로 공기를 불어 넣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스가와라는 마치 물총이라도 된 듯 물을 뱉어냈다. 족히 한 컵은 나올만한 양이었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그가 물을 토해내는 동안, 나는 물기가 흥건해 찝찝한 수영장 바닥에 널브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수영장 천장이 빙글빙글 돌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멈췄다. 느긋하게 화장실에 다녀왔던 쿠로오가 스가와라와 내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수업은 그걸로 끝이었다. 내 소망이 이루어졌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나는 쿠로오가 날 일으킬 때까지 그냥 그곳에 누워있었다. 괜찮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치켜뜨자 타올을 뒤집어쓰고 간이의자에 앉아있는 스가와라가 보였다. 시퍼랬던 입술이 어느새 제 색을 찾아 붉었다. 멍하니 앉은 스가와라와 눈이 마주쳤다. 고마워. 스가와라가 말했다. 아니,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는데 이상하게 내 귀에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냥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부축을 받으며 탈의실로 가는 동안, 물 아래서 본 스가와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 두루뭉술한 형체로만 보이던 스가와라는, 정말이지 하얗게도 빛났고,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래서 이름만 알지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도 없던 스가와라를 그토록 열심히 구한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짐작한다.
꼬박 이틀을 앓았다. 해열제도 듣지 않는 열이 밤새 나를 괴롭혔고, 엄마는 응급실에라도 가자며 안절부절못했다. 팬티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오들오들 떨다가 잠이 들면, 꿈속에서 나는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꿀꺽꿀꺽 수영장 물을 많이도 삼켜 죽기 일보 직전이 되면 잠에서 깼다. 착한 일을 했는데, 왜 벌을 받는 거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면서 나는 왠지 모를 억울함에 몸서리쳤다.
사흘 만에 열이 내려 학교에 갔다. 교실 앞에서 저 멀리서 걸어오던 스가와라를 맞닥뜨렸다. 저기, 괜찮냐? 우물쭈물 서 있는 그에게 묻자 스가와라가 눈을 아래로 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덕분에.]
교실 문을 반쯤 열었다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꼭 이어폰을 통해 들린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내 몸 안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산뜻한 그 목소리를 뺀 다른 소음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스가와라는 여전히 그대로다. 뭐지? 검지로 귓구멍을 후비적 대며 눈을 깜박거리자 날 마주 본 스가와라가 눈을 크게 떴다.
[왜 안 들어가지?]
어?
[응?]
스가와라가 말한 게 분명한데 내가 쳐다보고 있던 스가와라는 입술을 꾹 다문 채였다. 복화술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가로막고 선 교실 문 뒤로 어느새 작은 줄이 생겨났다. 야, 오이카와. 왜 그러고 있는데? 스가와라 뒤에 있던 녀석이 벌컥 성질을 내는 턱에 일단은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각선에 앉은 스가와라의 뒤통수가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을 받아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스가와라는 분명히 말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들렸다. 아니, 말이 아니라 생각. 눈을 크게 떠보고 꿈이 아닐까 싶어 혀도 깨물어 보았지만,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가져다준 전율이 사라지고 나니 남는 건 걱정이었다. 뭐지? 남자와 키스한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그래서 환청이 들리는 건가? 딱 죽을 만큼 아팠던 게, 사실은 신병이었나? 나 이제 귀신이 보이는 걸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의외로 스가와라는 속으로는 말이 무지하게 많았다. 밖으로 내뱉는 말은 생각의 양을 눈곱만큼도 쫓아오지 못했다. 대부분은 평범했다. 창밖을 쳐다보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점심으로 먹었던 소세지 볶음이 맛있어서 또 먹고 싶다고 중얼댔다. 생각보다 애같이 순수한 구석이 있네. 내 의식의 팔 할은 여자 아니면 야한 거인데...
수업이 끝나고, 스가와라가 교실을 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계속 들리면 어쩌지 했는데. 스가와라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얼마 안 가 그의 목소리도 같이 사라졌다. 다시 찾아온 머릿속의 고요함이 겨우 하루 만에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와쨩. 뭐 하나만 물어볼게.
옆에서 가방을 챙기던 이와이즈미를 툭 치자 이와쨩은 내가 만진 팔에 더러운 세균이라도 묻었다는 듯 자신의 팔을 탈탈 털었다. 뭔데? 상처받으려던 것도 잠시, 나는 한껏 목소리 볼륨을 낮추고 말했다.
스가와라 말이야. 쫑알쫑알 되게 시끄럽지 않아? 말 되게 많아, 그치? 이와쨩은 희대의 미친놈을 보는듯한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가방을 들쳐멨다. 환청 들리냐? 오이카와, 아프면 집에서 요양해라, 학교 나오지 말고. 그 길로 이와쨩은 뒤도 안 돌아보고 교실을 나갔다. 쌀쌀맞은 이와쨩 덕분에 한가지가 확실해졌다. 역시. 스가와라의 생각은 나한테만 들린다.
사람이 간절해지면 평소랑은 좀 달라지나 보다. 요즘 들어 비정상적인 생각을 마구마구 하고 있었다. 딱 죽기 일보 직전까지 아픈 후에 스가와라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또 그만큼 아프면 안 들리지 않을까 해서 비 오는 날에 밖을 쏘다니고. 또다시 키스하면 안 들릴까 하는 마음에 스가와라와 입술을 부딪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남자들이 하는 스킨십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내가 들러붙으면, 이와쨩과 맛층은 나를 밀어냈다. 그렇게 장난처럼 이어지는 스킨십은 하루 일상과 같이 익숙했다. 그러므로 인공호흡의 이름을 빌린 스가와라와의 키스가 내게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남자와의 키스라는 게 뭐 별거 있나? 그저 썩은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기억의 쓰레기통에 툭 던져놓으면 될 것을. 그러면 금방 잊히는 게 그런 일들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그만이었다.
교실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를 쳐다보면서,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걸 알게 됐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들춰보면 모조리 스가와라였다. 아무렇지 않게 스가와라를 대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았고, 나는 결코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안 가져왔나 보네...]
지붕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뒤편에서 불쑥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투명한 비닐우산을 펼쳐 든 스가와라와 눈이 마주쳤다. 씨익 웃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입만 벙끗댔다. 스가와라는 자신이 든 우산을 검지로 쿡 찔렀다가, 나를 가리켰다.
[우산 같이 쓸래?]
미안. 나 수화를 못 해.
운동장을 벗어날 때 쯤 내가 불쑥 그렇게 말하자 스가와라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런 말이 익숙하다는 듯,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괜찮아. 이렇게 대화하면 돼.'
그가 보여준 핸드폰 화면에는 빠른 속도로 그가 입력한 글자가 둥둥 떠 있었고, 나는 그 글자 그대로 속삭이는 스가와라의 담담한 음성을 들으며 우산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무언가에 가슴께를 쾅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멎는 게 이런 느낌일까. 감히 짐작해보았다. 고등학생 남자 둘이 쓰기에는 너무 작은 우산 턱에 조금 젖은 스가와라의 어깨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스가와라 때문에 눈이 부셨으니까.
'집이 어디야? 데려다줄게.'
아니. 그거 보다,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눈을 동그랗게 뜨며 궁금해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스가와라는 큭큭 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뭐지. 마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해지려는 그때,
'키스 말하는 거지? 그래, 좋아.'
입안에 침이 마를 정도로 오랜 시간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한 채로 스가와라를 쳐다보았다. 설마 단번에 알아차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내가 스가와라의 생각이 들리는 것처럼, 스가와라도 내 마음이 들리는 걸까? 지금껏 해왔던 부적절한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죽을까? 지금 바로 죽어버릴까.
'오이카와 너는 읽기 쉽거든. 아까부터 계속 내 입술만 쳐다본 거 알아?'
장난스러운 얼굴로 스가와라가 입술을 쭈욱 내밀자, 안 그래도 달아오르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스가와라가 웃으며 내 손에서 우산을 가져가더니 우산을 기울여서 얼굴 위를 가렸다. 잠잠히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는 스가와라를 보며 어쩔 줄 몰라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데,
[할 거면 빨리 해.]
에라, 나도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얼른 스가와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들리고, 눈을 뜬 스가와라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손부채 질을 하며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스가와라의 여전히 생각이 들리는가 궁금했다.
뭐라고 좀 말해봐.
그렇게 말하자 스가와라는 얜 미친놈인가? 하는 눈빛으로 코웃음 쳤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나도 너랑 대화하고 싶어. 핸드폰과 글자로가 아닌, 목소리와 감정으로 하는 대화.]
할 수 있어.
[응?]
나 네 목소리가 들리니까.
이제서야 조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스가와라를 바라보며, '어떻게 되어도 좋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찬찬히 채워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나는 행운아였다. 이 세상에서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유일한 한 사람. 나는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다.
-
시간이 없어서 뭔가 급 마무리....
[]는 스가의 속마음이고, ''로 표현된 말은 스가가 핸드폰에 적은 말입니다.
저 탈덕 안 했어요...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괜히 외침
'전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와오이] 머메이드 (0) | 2016.03.20 |
---|---|
[오이이와] 마피아 게임 (0) | 2016.03.11 |
[쿠로켄] 추락 (0) | 2016.03.06 |
[오이쿠로다이스가] 너를 위해서 (0) | 2016.03.06 |
[쿠로켄] 비가 오는 날의 가출 (2) | 2016.02.28 |